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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남산의 부장들 -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다

 

설 연휴 동안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보았습니다. 별 기대 없이 보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괜찮아서 결국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김재규, 김형욱, 차지철, 박정희 등 10.26이 일어나기 전이 유신 정국이 영화의 배경입니다. 

 

사회적인 배경 

 

역사 공부를 하며 늘 유신 정국이 궁금했습니다. 박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를 의사로 봐야 할 것인지, 그의 행동을 하극상으로 봐야 할 것인지 아직까지 논란이 많습니다. 저 역시 이를 알고 싶어 그 시대를 살았던 부모님에게 물어도 보고,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보았으며, 시중에 출판된 3권의 책도 읽어보았습니다. 물론 쉽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김재규는 분명 오래전부터 '거사'에 대한 생각을 품어왔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당시 미국 대사가 말하길 그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이상한 중정부장' 이었다고 합니다. 영화에도 이런 모습은 자주 등장합니다.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처럼 탱크로 밀어버리자는 차지철의 의견을 경악스럽게 보며 반대합니다. 또한 야당 국회의원들을 어느 정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는 시대가 변하고 있고, 시대가 원하는 리더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박 대통령을 폭로하는 김형욱도 등장합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김형욱이 미국 의회에서 코리아게이트에 대해 폭로한 사건으로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김형욱 역시 전직 중정부장이지만 박 대통령에게 버림받은 후, 미국으로 망명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 의회에서 박 대통령을 폭로하고, 비난하는 책을 출판하자 그는 살해당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실종'됩니다. 영화에서는 김재규와 차지철이 서로 김형욱을 먼저 처리하려 경쟁하였고,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살해되고 실종되었는지 아직도 추측만 무성합니다. 

 

권력의 중독성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 반지를 소유했던 사람들 모두 그 반지에 집착해 괴물처럼 변해버립니다. 반지를 없애러 갔던 프로도 역시 정신을 지배당해 반지를 없애려던 결심을 그만둡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샘의 도움으로 겨우 반지를 없애는데 성공합니다. 

권력의 속성이 바로 이 반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박 대통령 역시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려, 18년 동안 독재를 이어갔고, 영원히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려 '유신헌법'을 선포합니다. 

 

권력을 오래 잡게 되면 주변인들도 권력을 탐하는 사람처럼 보이나 봅니다. 군사 쿠데타까지 일으킨 사람의 리더십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2인자를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주변인들을 끊임없이 교체하며 그 위에 군림합니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절규하듯 내뱉는 심정은 분명 실제 김재규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공작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중정, CIA,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들이 하는 공작입니다.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CIA에서 한국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에 떡하니 도청장치를 설치해놓은 장면, 중정 부장 이병헌을 불러 박 대통령을 내려오게 하라고 압박하는 장면, 해외에서 다른 나라 정보요원에게 사주하는 장면 등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늘 베일에 싸여있는 정보기관이 하는 일이 영화에 구체적으로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이병헌의 연기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박 대통령을 도청하며 변화되는 이병헌의 표정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한때 정말 따랐던 대통령을 도청하고 있는 현실과 그 대통령에게 내쳐진 자신의 모습이 서글퍼 아까 맞았던 비가 흐르는 것인지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 저는 이 영화에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병헌은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김재규의 버릇까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김재규가 실제 재판장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이병헌은 이 사람의 성격이 아주 깔끔하지만 강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감정을 내뱉고 많이 표현하는 것보다 절제하면서 연기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이병헌의 연기가 빛을 발했습니다. 

 

역사의 재평가 

김재규의 무덤을 구글에서 찾아보면 비석이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훼손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김재규는 아직까지 역적인지 의사인지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김재규가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치른 거사인지 단지 충성 싸움에서 밀려나게 생기자 우발적으로 벌인 일인 것인지,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담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대중적으로 그 가능성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육본? 중정?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날 육본으로 가지 않고 중정으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차피 잡혔을 것이다', '그때 비서실장을 죽이고 차지철에게 뒤집어 씌웠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등 많은 추측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쉽게 결정 내리고 않고 싶습니다. 단 1%의 가능성만으로도 바뀌는 것이 역사니깐요.